고요가 선명해질 때, 혜리는 ‘아직도’ 자라는 중

혜리의 겨울은 시끄럽지 않다. 대신 또렷하다. 문득 멈춰 선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음 장면을 이미 준비하고 있는 얼굴. 올겨울 올루어가 포착한 혜리는 “새로운 시작의 문턱”에 서서, 남들이 만들어둔 속도 대신 자기 리듬을 고르는 중이었다. 페라가모의 미니멀한 실루엣이 그 조용한 결심을 더 선명하게 비추고요.
인터뷰의 시작은 의외로 가벼운 농담에서 출발한다. AAA에서 보여준 ‘밈 챌린지’가 크게 바이럴 됐다는 얘기에 혜리는 “팬 사인회에서 배운 챌린지”였다고 웃는다. 트렌드는 빠르게 갈아치워지고, 모르는 말도 쏟아지지만, 그 속도를 완벽히 따라잡는 대신 “우리만의 바운더리를 만들자”고 말한다. 유행을 쫓기보다, 유행이 지나가도 남는 태도를 챙기는 쪽에 가깝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건 뭐냐는 질문에 혜리는 “일”이라고 답한다. 너무 재미없는 말일까 잠깐 멈칫하지만, 그 다음 문장이 진짜다. “일을 잘 끝냈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 그리고 싫어하는 건 공복과 추위. 겨울 촬영을 오랜만에 하면서 그 사실을 새삼 체감 중이라며, 현실적인 투정을 섞는다. 화려한 커리어 토크보다 이런 생활감 있는 고백이 오히려 혜리를 더 사람답게 만든다.
2025년은 마음에 드는 해였을까. 혜리는 “최고는 아니고 최선”이었다고 정리한다.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 ‘선물 같은 해’였고, 크리스마스 시즌의 두근거림을 1년 내내 느낀 기분이었다고. 특히 <선의의 경쟁>의 사랑이 해외까지 이어지며, 데뷔 후 첫 팬미팅과 10개 도시 아시아 투어, 그리고 팬클럽 ‘혜루미’의 탄생까지 이어졌다. 한 사람의 해가 ‘행사’로 가득 찼다기보다, ‘관계’로 밀도가 높아진 느낌이다.


시간이 훅 지나간다는 얘기엔 <응답하라 1988> 10주년이 나온다. “10년이나 됐어?”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오고, 오랜만에 만난 언니 오빠들과 “장소만 바뀌었지 그때 같다”는 대화를 반복했다고 한다. 가장 선명한 장면으로는 1회 생일 파티 신, “나는 왜 덕선이야!”를 꼽는다. 열심히 준비했고, 덕선이의 감정이 폭발하며 공감을 끌어냈던 순간. 무엇보다 ‘혜리에 대한 우려’를 씻어준 장면이라 더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자신이 넘어야 했던 벽을 본인이 제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만약 ‘배우 혜리 특별 상영회’에서 세 작품을 틀 수 있다면, <응답하라 1988>을 시작으로 <빅토리>, <선의의 경쟁> 순서로 고른다. 시작 같은 작품, 영화로 인정받은 작품, 올해의 큰 행복을 준 최근작. 이 배열이 혜리의 현재를 설명한다.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 성취를 확인하고, 지금의 자신을 맨 마지막에 조용히 올려놓는다.


그럼 혜리에게 가장 큰 변화를 남긴 작품은 무엇일까. 그는 <빅토리>를 꼽는다. ‘필선’이라는 인물이 가진 단순함, 재지 않고 사랑하는 것을 향해 직진하는 태도가 도전의 열정과 만족감을 남겼다고. 나태해질 때마다 그 영화를 떠올린다는 말이 좋다. 동기부여가 책상 위의 문장에 있는 게 아니라, 한 번 살아본 캐릭터의 심장박동에 남아 있다는 뜻이니까.
유튜브 ‘혤스클럽’ 이야기로 넘어가면, 혜리는 질문하는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을 슬쩍 드러낸다. 작가 없이 운영하며, 일부러 심각한 질문보다 “편하게 수다 떠는 콘텐츠”를 만들겠다고 정해두었다고. 본인의 강점은 “인터뷰이가 방송인 걸 까먹게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질문은 대단한 장치가 아니라, 상대의 본연을 꺼내는 작은 열쇠에 가깝다. “뭐 좋아하세요?” 같은 단순한 질문이 오히려 사람을 솔직하게 만든다는 걸 알고 있는 진행자다.


마지막엔 1월 1일의 장면을 그린다. 해 뜨는 걸 보고, 규칙적으로 먹고, 반성과 목표를 세우고, 작심삼일인 걸 알아도 단 하루만이라도 원하는 모습대로 살아보는 것. 그러면서도 “오전 11시쯤 일어나겠죠?”라고 스스로를 가볍게 낮춘다. 이상과 현실을 둘 다 품을 줄 아는 사람이 내년에 가장 강해진다. 혜리의 고요가 선명한 이유도, 그 균형감 때문이다.









